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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마녀사냥의 끝

수세기에 걸쳐 광란을 연출하였던 마녀재판도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였다. 르네상스의 진전과 더불어 이성적 세계관과 과학 정신의 대두는 불가피한 시대정신이 되었고 이것은 신학에 기반한 과학의 해방을 의미하였다. 이로써 불합리의 극치인 마녀재판도 존립의 근거를 잃게 되었다.

18세기를 지나면서 마녀의 고문과 그에 따른 화형도 사라졌다. 독일의 경우 1749년 뷰루소부르크에서 1건, 1751년 아인팅겐에서 1건, 1775년 겜텐에서 1건의 마녀재판이 기록되었고, 7년 뒤인 1782년 스위스의 게랄스라는 지방에서 아인나 겔티라는 마녀가 고문 끝에 참수형에 처해진 것을 끝으로 마녀재판은 유럽대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처럼 악마와 마법 그리고 마녀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신념은 지배계급과 당시의 지식인인 신부와 법관들이 만들어낸 문화적 산물이었다. 마녀사냥의 주된 공격대상은 과부 즉 여성이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이란 원죄로 각인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악마의 심부름꾼이라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있었고, 여성의 육체 자체가 두려움을 자아낸 것이다.

마녀사냥이 그리스도교 이외의 어떤 사상과 움직임도 용납할 수 없었던 중세사회에서 대다수 민중들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마녀라는 이름의 희생양을 통해 대리해소하는 동시에 마녀를 따돌린 '우리 사회'는 안전하다는 만족감과 감사함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사회적 배제·통합기제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출처-http://100.naver.com/100.nhn?docid=745499   네이버 백과사전 "마녀사냥"


많은 사람들이 마녀사냥의 절정기만 바라보고 그중 일부는 그 내용을 즐기기까지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렇게 활발하던 마녀사냥은 어떻게 끝나게 되었나?"라고 물어보면 답을 못했습니다. 물론 시작도 중요하지만 비교적 시작보다 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것 같아서 찾아보았습니다.

마녀사냥 소재를 이용하여 즐긴다는 것은 지금까지 말도 안되는 오해로 죽어간 수많은 여성들에게 또다른 마녀사냥이 아닐까 싶습니다.